다니엘에 나타난 70 이레에 대한 연구70 이레의 마지막 시점(the terminus ad quem)을 예수 그리스도 초림과 A.D 70년의 티도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으로 본다.
다니엘에 나타난 70 이레에 대한 연구
한국기독교이단상담연구소 박형택 목사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보고 연구하면서 예레미야 25:12-14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며 내가 바벨론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리라”는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연수(年數)를 깨닫게 되었는데 예루살렘의 황폐함 곧 포로시대가 70년 만에 마칠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응답을 하셨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때가 B.C 605년이라면 그가 예레미야의 글을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인 69년 정도 되었던 듯하다. 환상중에 가브리엘을 통하여 주시는 환상이 바로 칠십(70) 이레에 대한 것이다. 단순히 년수(年數)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포로생활 70년이 끝나고 또 다른 하나의 칠십(70) 이레의 하나님의 작정된 시간의 놀라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바벨론 포로 70년이라는 기간은 확실한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cal time)으로서 표현하고 있지만 “70 이레”는 확실한 연대기적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70의 7(Seventy sevens) 곧 일흔의 일곱이라는 표현으로 연대기(年代記)적 시간을 나타내는 경우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포로생활 70년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간임을 분명하게 묘사해 준다. 단 9:5-18은 다니엘이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한 내용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범죄,패역,행악,반역 법도와 규례를 떠남”(5절), “주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불순종”(6절),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10절), “주의 율법을 준행치 않음”(10-11)이라고 한다.
그 범죄의 결과로서 “각국으로 쫓아냄”(7절) “큰 재앙”(12절)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모든 재앙”(13절) “여호와께서 간직해 두신 이 재앙”(14절) “주의 분노”(16절) “수치를 당함”(16) “황폐한 성소”(17절)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황폐한 성소”(18절)라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아 달라는 다니엘의 기도이다.
따라서 70년의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이스라엘이 재앙을 받는 기간이지만 칠십 이레(7의 70)의 기간은 반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과 구속의 사건이요 회복의 사건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70 이레”라는 기간은 단순한 70주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שבעים שבעים(솨부임 쉬브임/seventy weeks) 70 이레는 성경에서 말하는 제 7일 안식일의 Sabbath-weeks 이나 Sabbath-year(안식년)을 의미한다든지 7년 안식년의 희년(cycles of seven years)을 말하는 근거도 없고 Year-weeks 즉 한 주간이 7년을 의미한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 기간은 절대적인 개념으로서 “the seventy-sevenths” 곧 70 이레가 전체로서 seventy가 seven times로 계속되는 기간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즉 상징적으로 하나님이 정정해 놓으신 기간이라는 것이다.(but only symbolically defined periods of measured duration) 이 기간에 메시야를 통하여 구속을 가져올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신적 구속적 프로그램을 전개시키실 것이다. “주간들”이라는 말은 주로 여성 복수로서 שבעות 샤부오트의 형태를 취하지만 (창29:27, 출34:22, 신16:9등) 다니엘서 9:24에서는 남성 복수인 שבעים(샤부임)을 사용하였다. 통상적인 여성복수 대신 남성복수를 사용한 것은 “주간들”이라는 이 말이 통상적인 관념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 같다. 이 말 자체는 시간적 길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클리포드는 “하나님의 창조주간 이후로 ”일곱“은 항상 신적활동 혹은 신적 사역을 의미하는 상징수이다. 70은 7×10으로 완전 혹은 완성을 의미하는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70의 일곱들은 가장 중요한 신적 사역을 완성하는 기간이다”라고 하였다.
70 이레의 중심은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에 있다. 지극히 거룩한 이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요 기름부음은 성령으로 기름부음(anointing) 받음을 의미한다. 메시야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메시아의 사역과 메시야의 독특한 성격에 대한 구약적 표현이다. 이사야 11:1, 42:1, 61:1의 말씀대로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는 표현한 것과 사도행전 10:38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라는 예언과 성취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첫째 기간은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가 되는 동안 거룩한 기름부음 받은 자 왕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 기간은 예순 두 이레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진다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타낸 것이고 셋째 기간으로서 마지막 한 이레동안은 한 왕의 백성이 올라와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는 상황이 온다는 것은 A.D 70년의 로마의 장군 티토(Titus)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사건을 나타낸다.
24절에서는 다니엘에게 네 백성(이스라엘 백성)과 네 거룩한 성(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간을 70 이레로 정하였다(are decreeded)고 한다. 그리고 그 기간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를 통해서 은총을 내리시며 구속하신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허물이 그치며(to finish transgression)
② 죄가 끝나며(put an end to sin)
③ 죄악이 용서되며(to atone for wickedness)
④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to bring in everlasting righteousness)
⑤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to seal up vision and prophecy)
⑥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to anoint the most holy)
이 6가지 결과들은 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는데 각 3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지는데 처음 3가지는 죄를 제거시키는 소극적 방면이고 나중 3가지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적극적 방면이다.또 다른 대구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첫째와 넷째, 둘째와 다섯째, 셋째와 여섯째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카일(Keil)은 그의 주석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도성이 단순히 유대인과 지리학적 예루살렘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신약교회와 지상의 하나님의 교회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24절의 내용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25-26A에서는 다니엘에게 깨달아 알아야 할 사항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 전후에 일어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From the issuing of the decree to retore and rebuild Jerusale) 기름부음을 받은 자 왕이 일어날 때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를 지날 것이라고 한다. 또 그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진다고 한다.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역사상에서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스가랴 6:13, 시편 110:4, 요4:25)
예순 두 이레후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지고 성읍과 성소가 훼파된다고 한다. 그래서 70 이레에 대한 기간을 세 기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일곱 이레(seven sevens)요 둘째는 예순 두 이레(sixty-two sevens)요 셋째는 한 이레(one sevens)이다. 이것은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 이레가 7년을 의미하는 490년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통신학은 70 이레의 시작점(the terminus a quo)을 B.C 536년 바사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을 귀환시키고 성전을 재건하라는 영(令/edict)을 내린 때라고 보고 있다.(칼빈, 영, 카일, 에브라르드, 클리에포드, 하비 칸, 박윤선등의 주장)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예배회복(禮拜回復)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에스라를 귀환하도록 했던 아닥사스다왕 17년 곧 B.C 457년으로 보기도 하고 행스텐버그(Hengstenberg)와 같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느혜미야가 귀환한 아다사스다왕 제 20년 B.C 445년을 70이레의 시작점(the terminus a quo)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라에게나 느헤미야에 아닥사스다왕이 성전 재건의 영(令)을 내린적이 없다. 70 이레의 마지막 시점(the terminus ad quem)을 예수 그리스도 초림과 A.D 70년의 티도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으로 본다.
하나님이 정하신 70이레의 시작점은 고레스 왕이 B.C 536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과 성전 재건의 영(the Edict of Cyrus)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사야 44:28, 45:13, 대하 36:22-23, 스 1:1-4)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고발하여 아닥사스다 왕이 영을 내려 성전 재건을 중단시킬 때는 벌써 성전건축이 진행되고 성읍이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고 있었었던 상황이었다.(에스라 4:12,9:9) 70 이레의 마지막 지점은 예수님 사후 37년후인 A.D 70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의 사건이 발생하며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당했기 때문이다.(마24:15,눅 21:20). 70 이레를 7이레+62이레+1이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각 부분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기간 일곱 이레(seven sevens)는 고레스 왕의 성전 재건을 명한 B.C 536년을 시작으로 에스라,느혜미야 시대까지로 본다. 이 기간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聖殿)과 성(城)의 회복이라는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기간 예순 두 이레(sixty-two sevens)는 암흑시대인 400년을 거쳐 메시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까지로 보는데 이 기간은 일곱 이레 곧 예루살렘 성(the building of city)의 재건과 한 이레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끊어짐(the cutting off of an anointed one) 즉 십자가의 죽으심과의 사이에 낀 기간이다.
셋째 마지막 기간 한 이레 곧 62이레 후에 일어난 두 사건은
①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끊어짐(the cutting of the Messiah)(사53:8/예수님의 crucifixion을 의미) 과
② 성읍(城邑)과 성소(聖所)가 훼파되는 예루살렘의 멸망사건(the destruction of the city of Jerusalem)이다. 마지막 한 이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부터 예수님 사후 A.D 70년의 티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70번째 이레(70th seven)의 중간에 일어나고 도성의 멸망(the destruction of the city)은 칠십 이레 종료후(the expiry of the 70 sevens)에 일어난다.
25절은 첫 번째 기간으로서 스룹바벨(Zerubbabel)과 여호수아(Joshua)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과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상황을 말씀하고 있다.
26절에는 62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One)가 끊어지고 그 후 한 왕의 백성(the people of the ruler)이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린다고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으며 끝까지 전쟁이 있고 황폐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사건 곧 예루살렘 성읍과 성소가 무너지고 전쟁과 황폐하게 되는 것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것(have been decreed)이라고 한다.
한 왕의 백성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한 왕은 A.D 70년의 로마 장군 티투스 베스파니아누스(Titus Vespasianus)이며 백성은 그가 지휘하는 로마 군대를 말한다.
주님은 마태복음 24:15이하에서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So when you see standing in the holy place the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Daniel)이라고 표현하지만
누가복음 21:20에는 같은 사건을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When you see Jerusalem compassed with armies)이라고 표현하신다. 그런데 로마 군대에 의해서 파괴되는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이 하나님의 작정된 사건(desolations have been decreed)이라는 사실은 독자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던 유대인들이 그 죄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이 담당하겠다고 하던 그 장본인들이 받는 형벌이다. 다니엘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하여 기절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사건에 대한 역사가 요셉프스의 기록에 나타난 내용들은 정말 공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다음 몇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① 역사적 정황들 ② 티투스 베스파니아누스 ③ 예루살렘 멸망의 비참함이다. 아래의 내용은 3가지 사항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의 정황과 예루살렘의 멸망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 당시 유대총독은 빌라도 였는데 예수님 사후 수많은 총독들이 바뀌었고 예수님 사후
29년 곧
주후 62-64년까지 글로디우스 알비누스(glodius alvinus) 총독이 재임하여 통치하였는데 유대인들에게 높은 세금을 내게하며 직권을 남용하며 자기 욕심을 채웠고
주후 64-66년까지 게시우스 플로루스(Gesius florus)가 재임하며 갖은 악행을 일삼자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플로루스는 이 폭동을 진압하면서 폭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잡아 투옥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가정집에 들어가 약탈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는데 부녀자들을 포함하여 약 3천 6백명이 학살을 당하였다.
이미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 과격파는 사해 근처 맛사다 성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주둔군을 공격하여 섬멸하였으며 당시 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원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군대에 맞설 것을 선언했다.
당시 분봉왕이었던 아르립바 2세는 유대인들과 로마군 사이에 중재를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3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유대인 폭동을 잠재우려 하였으나 패배하였으며 시리아 총독 갈루스도 군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진압하려 하였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퇴각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악화에 당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지휘하는 3군단과 원군들을 합쳐 6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전략을 단단히 세우고 예루살렘 성채를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을 준비하였다.
A.D 67년부터 A.D 68년 초까지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당시에 로마황제였던 네로가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심지어 로마를 화재로 불태우고 유대인들에게 그 죄를 뒤집어 씌워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각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A.D 68년 9월에 네로는 자살을 하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퇴각을 하고 로마의 내란에 뛰어들고 결국 갈바와 비텔리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황제가 된다.
A.D 70년 로마의 내란이 정리되고 다시 예루살렘 공략이 시작되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 아들 티투스(Titus)에게 14군단을 지휘하게 하여 A.D 70년 4월부터 9월까지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여 물 공급을 차단하고 토성을 쌓아서 예루살렘 성벽을 넘을 수 있도록 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 이미 갈릴리에서는 유대인들 수 천명이 피살되고 3만명 이상이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데 예루살렘 안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항전파(抗戰派)와 평화파(平和派)가 서로 대치한 가운데 항전파는 암살대를 조직하여 남녀노소 불문하고 평화파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요세프스는 “성전 바깥뜰에는 피가 흘러넘쳤으며 그 날에 8.500명의 시체가 있었다. 내란으로 인하여 살해를 당한 사람은 12,000이상이었으며 로마 군대의 지지자(支持者)로 간주될까봐 아무도 두려워서 그 시체들을 매장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고 기록한다.
예루살렘을 장기간 포위하여 전쟁을 계속하는 사이에 110만명이 죽었고 97.000명이 노예로 팔렸다고 한다. A.D 70년 9월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점령되었다.
예루살렘이 완전 포위되어 도망갈 수도 없고 먹을 물과 음식이 없어 수없이 굶어 죽고 너무 배가 고파 자신의 어린아이를 삶아 먹는 일도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금화를 삼키고 도망한다는 소문 때문에 산채로 사람의 배를 갈라 금화를 찾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건도 있었으며 강도들이 칼이 잘드는지 시험해 본다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찌르는 등 처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에는 유월절 때문에 거의 270만명의 백성들이 죽어간 것이다.
다니엘 9:26절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이미 작정된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도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마태복음 24:15-22, 누가복음 21:20-24, 마가복음 13:14-23에 상세하게 예언을 하신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A.D 70년에 성취가 된 것이다.
26절의 “장차 올 한 왕의 백성”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한 왕이 누구냐에 대하여 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안티오커스 에파파네스라 하고 ② 루폴드는 적그리스도라 하고 ③ 칼빈과 영은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라고 한다. A.D 70년의 사건이라면 당연히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9:26-27절의 사건이 한 왕 곧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 한 사람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행하지는 사건이냐 아니면 중간에 27절의 그(He) 곧 주님께서 언약을 세우고 제사와 예물을 금하는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27절 상반 절의 “그가(He)” 예수님을 말하느냐 아니면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를 말하느냐 아니면 재림하실 예수님을 말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반절의 내용은 인칭대명사는 황폐케 하는 자가 확실하다. 주님이 아니시다.
27절에 보면 “그(He)가” 라는 인칭대명사가 나오는데
① 그가 장차 많은 사람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맺고
He will confirm a covenant with many for one “seven”
②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In the middle of the “seven” he will put an end to sacrifice and offering.
③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And on a wing of the temple he will set up an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
④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기록한다.
until the end that is decreed is poured out on him
여기에 나타난 그(he)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해석이 달라진다. 인칭대명사 “그가(He)”의 선행사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냐? 아니면 “한 왕의 백성”이라는 말 가운데 한 왕이냐? 하는 것이다.
과연 “그”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고 주장하는 이들(몬트고메리와 드라이버)도 있고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이들(호크마주석,옥스포드주석,이동원,게이블라인이나 세대주의 학자)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드워드 영,하비 칸)도 있고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라고 하는 이들(카일)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전파괴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끝어진다는 이러한 사건 자체를 헬라 시대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를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 주장을 하는 것이고 세대주의 학자들은 69이레와 나머지 1이레 사이에 2천년이라는 긴 괄호시대(the parenthesis)를 주장하기 때문에 로마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재생 로마가 현재시대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언약을 맺고 제사와 예물을 금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제이 영 박사는 마지막 한이레 동안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그 결과로서 따라오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티투스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70th 이레에 메시야가 많은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마지막 한 이레 절반에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의 제사와 예물(Jewish sacrifices and oblation)을 금지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 결과로 황폐케 하는 자(a desolator)가 성전 꼭대기(over the pinnacleof the Temple)에 나타나고 이것이 이제 멸망의 가증한 것(an abomination)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70 sevens의 마지막(termination)에 대하여는 본문에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69이레의 종말점(terminus ad quem/termination) 대하여는 한 왕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an anointed one, a prince)를 언급한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메시야의 사역(Messianic work)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속의 역사가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내용이다. 다니엘 9:24에 주어진 말씀처럼 메시야의 사역은 부정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negative and positive)으로 묘사되는데
부정적(negative)인 면은
허물이 그치며(restraining the transgression),
죄가 끝나며(completing sin),
죄악이 용서되며(covering iniquity) 이고,
적극적인(positive) 면은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bringing in everlasting righteousness)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sealing up vision and prophecy)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anointing a holy of holies)이다.
따라서 27절의 “그(He)”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카일(C.F Keil)은 27절의 “그가(He)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라는 문장에서 히브리어 והגביר (그가 언약을 맺다)의 주어(subject)이고 26절의 “그의 마지막은”에서 히브리어 וקצו (그의 마지막)의 주어(subject)라고 한다.
그 주어는 바로 26절의 한 왕의 백성에서 한 왕(נגיד Nagid)이라고 한다. 즉 한 왕의 백성은 로마 군대요 한 왕은 티투스를 말하는데 다니엘 7:25의 작은 뿔과 동일 인물로서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를 하고 있다.
“한 왕의 백성”이 와서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는데 바로 한 왕이 27절의 주어가 되어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라트 베리트 (כרת ברית)(to cut a Covenant with)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힉비르 베리트(הגביר ברית)(to make a covenant strong)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강제로 언약을 맺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한(faithful) 적은 수와 대조하여 마태복음 24:12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배도한 많은 사람들(apostates)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이 많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도록 하고 그들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자기를 높이도록 강한 약속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거룩한 이는 능동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고 수동적(Niphal)이고 피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즉 기름부음을 받으리라(are decreed to anoint the most holy)(24절)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다(the anionted One will be cut off and will have nothing)(26절). 그런데 27절 전반부에서 “피동적으로 묘사된 거룩한 이 곧 메시야”가 갑자기 능동적인 행위의 주어가 되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조화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는 다니엘 9:27의 예언에 대하여 카일의 해석과 뜻을 같이 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마태복음 24:15-22, 마가복음 13:14-23)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누가복음 21:20-24)라는 말씀이 실제로 A.D 70년에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성취되어 성전(temple)과 성(city)이 파괴되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사건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27절 하반절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는 말씀은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표준새번역은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거기에 세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이 거기에 서 있을 것이라”고 기록한다.
영(Young)박사는 “황폐케 하는 자는 티투스가 아니다(The desolate is not Titus). 황폐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비인격적인 실체로서 황폐하게 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즉 파괴된 성전(temple)과 성(city)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영 박사는 가증한 것이 성전위에 있는 있는 동안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황폐함(devastation)이 계속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본 다니엘 9장 27절의 해석은 티투스(titus)에 의해 성(城)과 성전(聖殿)이 파괴되고 제사와 예물을 금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성전에 세우며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야가 재림해서 행하시는 것은 심판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거룩한 성전에 대하여 주신 응답은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진리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세이연 많이 본 기사
|